성령의 은사를 통해 우리들을 지혜롭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통해 우리들을 지혜롭게 하시는 것이다
  • 노재신
  • 승인 2018.05.22 0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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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는 영적인 신비함을 떠나 삶의 지혜가 되고 능력이 되며 권세가 되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를 지혜롭게 하리라." 하니 오해를 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성령을 받으면 머리가 좋아 지는 것이냐? 성령을 받으면 똑똑해 지는 것이냐? 

물론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아이큐가 좋아 지는 것이 아니다. 
모르겠다. 감성지수는 높아질지 말이다. 
그렇다면 '성령이 우리를 지혜롭게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하고 질문하고 싶은 이도 있을 지도 모르겠다. 

지혜란 지식과 다르다. 

물론 기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지혜란 지식과 달리 체험된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목사들과 성도들이 성경을 지식으로 배운다. 그리고 지식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다 성경 말씀이 고스란히 이루어짐을 체험하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성경 지식이 되지 않는다.
성경의 지혜가 되는 것이다. 

성령은 지혜의 영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성도들에겐 성령의 체험을 중요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성령에 관한 것도 지식으로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식적으로 알고 있던 성령을 체험케 되면 그것은 확신이 되며 곧 삶의 지혜가 되는 것이다.
성령의 체험이 지혜가 된다면 그 때부턴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를 지혜롭게 한다는 의미다.

사람의 지혜가 하나님의 어리석음 보다 낫지 못하다.
그러므로 성령의 체험이 있다 하여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지혜가 성령을 뛰어 넘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말이다.

진실로 회심한 이는 그러한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이 또한 지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체험했다고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체험은 겸손함이다.
그러나 악령(귀신)의 체험은 성령을 체험한 것 같지만 실상을 보면 교만함을 보이게 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영을 믿지 말라고 하셨다.

귀신도 있고 성신(령)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귀신과 성신(령)이 서로 대립하고 서로 대적하고 영적인 싸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섭리과 경륜 가운데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또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으로 귀신의 역사를 허용할 뿐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 심판은 악한 영(귀신)에 대함이며 마귀이며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며 사망인 것을 말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죄없다 하지 않으 실 것이다.
그렇다면 귀신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성령의 지혜로 분별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분별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을 불별의 은사라 한다. 

분별의 은사란 맛을 보는 것과 같다.

단 것을 달다 하는 것일 뿐 그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냥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영의 분별도 '악한 영(귀신)이다.', '혹은 거룩한 영이다.'라고 할 뿐이다.

어떤 이들은 영의 분별을 영의 색으로 분별을 한다고 하는 이도 있었다.
글쎄 그가 받은 분별의 은사는 영의 색으로 분별하게 되는 은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의구심이 든다.
영의 색을 어떻게 볼 수 있다는 것이냐? 영도 색이 있는 것이냐? 말이다.

색은 눈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영의 눈으로 본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영은 색이 없다. 하나님의 영이 색이 없음과 같이 말이다.
색이 없다는 말은 빛이라는 뜻이다. 빛은 모든 색을 모아 두면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이 투명해 진다.
색이 없다는 말은 진짜 색이 없음이 아니라 모든 색을 포함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하나님에겐 모든 세상의 색이 있다. 성령도 모든 색을 갖고 계신 빛이시다.
이 빛으로 보이는 모든 물체들을 분별케 함이다. 

기본적으로 영은 색으로 분별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느낌이며 그것은 그렇게 알게 되는 것이니 그래서 그것을 지혜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조심해야한다.
세상엔 성령을 가장한 분별의 영을 받았다 주장하는 이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들의 행위를 조심스럽게 살펴 보라. 분명 그들은 교만해 있을 것이며 그들의 행위는 무당 비스므리 할 것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영은 흐리다.
맑고 깨끗하지 않다는 말이며 투명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의 속에 무슨 생각과 마음을 갖고 있는 지 잘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귀신의 색이 있다면 회색 계열이거나 검은 색이다. 실재 검은색은 색이라 하지만 색이 아니다. 
그것은 흑백의 구별이므로 색이 아니다. 검은 색은 모든 것을 흡수한다. 

영은 색이 없지만 그들의 모습엔 분명한 차이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것을 색깔이라 할 수도 있다.
불교는 불교의 색이 있으며 유교는 유교의 색이 있고 이슬람이나 천주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엔 기본적으로 그들만의 색깔이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 우리 감리교회의 색은 어떤 색일까?
사람으로 말하는 웨슬리의 색이다. 그래서 웨슬리안이라 한다.
그러나 이 조차도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감리교회는 색이 없다. 웨슬리도 색이 없다. 왜냐하면 성령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강단 신학자들은 굳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지식색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색을 입히려 한다.
그것이 요한의 신학이니... 바울의 신학이니... 마태의 신학이니.... 누가의 신학이니.... 하는 분리주의다.
분리주의는 분별의 은사가 아니다. 

분광기란 것이 있다. 흔히 프리즘이라고도 불린다.
프리즘은 통해 빛은 다양한 색으로 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분광기는 특별한 색만을 구별하지 않는다.
다만 빛 가운덴 다양한 색이 존재함을 보여 줄 뿐이다.

성경이 분광기와 같다. 다양한 믿음의 모습을 보이는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성경은 이들이 서로 다름이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을 하나되게 하는 것이다. 
다양한 믿음의 색이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하나임을 보여주는 분광기가 성경인 것이다. 

그러나 강단 신학자들은 분광기가 아니라. 분리주의자이며 구별주의자들이며 자신의 색을 자랑함일 뿐이다.
그래서 강단 신학자들을 보면 교만하다. 지식을 자랑하고 자신의 스승을 자랑한다. 
그들은 자신의 업적을 뽐내고 자신의 약력들을 명예로 삼고 있으며 자신이 갖고 있는 교수권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을 한다. 

신학교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 답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고 학생들을 위해 존재하며 교회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신학교 교수들을 보라. 신학교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라 생각을 하는가? 하나님? 학생? 교회?

아니다 교수 자신들이 신학교의 주인이라 생각을 할 것이다. 하나님의 빛으로 가득 채우고 하나님의 빛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색을 칠하려 한다. 신학교가 색갈논쟁의 중심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거룩한 영의 역사가 아니다. 세상 색의 다툼이며 갈등이며 나눔이자 혼합주의적인 색깔의 혼합이다.
그래서 신학교의 색이 점점 회색이 되어가고 있으며 점점 검은 색에 가까와 지고 있다.

적어도 우리 나라 신학교는 그렇게 보인다. 신학교 교수들은 대부분 똑똑하다. 그들은 많은 신학적인 지식도 갖고 있다. 그러나 다만 그 뿐이다. 그들의 지식은 지혜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신학생들과 교회를 살리기보단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 성경은 선생이 되지 말라 하였지만 자신들이 선생임을 자랑하고 과시한다. 성경과 신학은 많이 알고 있지만 성경과 신학의 지식이 지혜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 할 것이다. 그들에게 신학과 성경은 밥벌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신학교가 색깔 논쟁에 휩싸이고 신학교가 지혜의 장소가 아닌 지식의 상아탑만을 높이 쌓아가니 그 신학교에서 배우고 졸업을 한 목사들도 교만해져가고 있으며 세상의 지식을 쌓으려고만 하며 학위 같지도 않은 학위를 자랑하고 패를 이루고 줄을 세운다. 신학교 교수들에게서 배운 지식을 그대로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다. 

고상한척, 아는 척, 젊잖은 척 하지만 이미 그들의 영은 이리가 되어 있다.
우스랍들이다. 우스의 맹금류와 같은 이들이다. 교회에 무리지어 다니며 사냥을 하는 랩터들인 것이다.

그러니 누가 문제이냐? 누가 더 문제이냐? 이 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전부가 문제이니 말이다. 

회개하지 않고는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이다.

그러나 문제는 회개하고픈 마음도 없을 뿐만 아니라 무엇을 회개햐야 할지 모르는 영적인 소경이자 귀머거리가 되어 있다. 빛을 잃고 맛을 잃었으니 세상 사람들에게 개독교인이라 먹사라 놀림을 받으며 무시와 조롱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회개케 하는 영이시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를 가능케 하시는 영이다.
이러한 진실한 회개를 통해 변화된 것을 회심이라 부른다.

회심을 하면 성령을 통해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이다. 

이 지혜는 지식의 체험이다. 그래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 구원을 이룸이다. 
성령은 우리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을 하나되게 하시는 영이시다. 

오늘날 또 다른 문제는 믿음과 아는 것이 따로 따로가 된 것이 문제이다. 
이것은 신학교 교수도 그러하고 대부분의 교회의 목사들도 그러하며 대부분의 평신도들도 그러하다.
그래서 열심을 내면 낼수록 문제를 만들어 낸다.
소위 말하는 영적(성경)인 갈증(욕구)이 많으면 많을 수록 거짓의 영에게 이끌리며 영적인 이리들의 먹이감이 되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리지어 다니는 영적인 랩터들의 사냥감이 되기 쉽다. 

성령은 영적 체험이자 영과 육을 하나되게 하는 거룩한 역사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영적인 체험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영의 지혜가 육체의 지혜가 되어 삶의 능력과 권세가 되는 것이다. 이 능력과 권세는 세상에서 얻는 것이 아니다. 하늘로부터 진실한 믿음의 자녀들에게 내려 주시는 은혜이자 성령의 은사가 된다. 

성령의 은사는 영적인 신비함을 떠나 삶의 지혜가 되고 능력이 되며 권세가 되는 것이다.

성령은 성령의 은사를 통해 우리들을 지혜롭게 하시는 것이다. 웨슬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회심을 하였다. 이 회심은 웨슬리의 색을 찾은 것이라 할지 모르나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웨슬리는 회심을 통해 경건주의자의 색을 버렸다. 웨슬리는 회심을 통해 웨슬리 자신의 고유한 색을 버렸다. 그리고 그의 영은 맑고 깨끗한 투명한 빛이 되었다. 

이 빛은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보인 거룩한 빛으로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기도 하며 거룩한 영이 함께 함이라 하기도 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고 믿는 구원의 빛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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