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의 은사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이상을 보게 할 것이다
교통의 은사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이상을 보게 할 것이다
  • 노재신
  • 승인 2018.05.22 14: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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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교통케 하시는 영이다. 

성령의 은사는 영적인 신비함을 떠나 삶의 지혜가 되고 능력이 되며 권세가 된다.

성령의 은사.....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갖게되는 능력들을 지칭함이다.
그 중 대표적인 은사가 방언, 통변, 예언, 치유의 은사를 들수 있다.
이러한 은사는 매우 기능적이다. 그러므러 성령의 은사는 그 기능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그 수에는 제한이 없다.
단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의 사건으로 드러난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은사들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은사들의 특징은 성령의 감동이다. 

성령의 감동을 통해 행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은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성령의 은사 가운데 소위 말하는 은사 주의자들이 가장 집착을 하게 되는 것이 방언과 치유임을 볼 수 있다. 특별히 웨슬리의 영향을 받았다 하면서도 현재 감리교회와 많은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는 오순절 계열의 교회들은 이러한 은사에 집착을 하고 있는 교단과 교회들이다. 특별히 우리 한국교회에서 자생했다 볼 수 있는 순복음은 방언 집착증을 보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언을 받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라 할 만큼 방언은 순복음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한 모습으로 순복음을 본다면 순복음이 방언이란 수식을 도출할 수 있다. 이러한 수식을 볼 때 순복음이 얼마나 빗나가고 있는 지를 확인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방언이 순복음일까?
물론 방언의 뒤엔 성령의 역사가 있으니 그렇다고도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방언 중에 얼마나 많은 방언들이 거짓 영의 방언이며 얼마나 많은 수의 방언들이 성령과 무관하게 행해지고 있음을 말이다. 성령을 받았던 마가의 다락방에 있었던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전한 것이 방언이란 말인가? 시장과 거리로 나가 외친 말이 방언을 받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인가 말이다. 

물론 방언에 집착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비단 순복음만의 모습은 아니었다. 우리 감리교도들과 장로교회들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기도원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영적 운동이라 하는 것을 전부 다 그렇다고 할 순 없지만 기도원 운동은 방언 운동이었다 해도 그리 무리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한국교회는 방언집착증을 보였고 방언집착증과 기도원 운동은 수없이 많은 이단과 사이비를 양산해 내었으며 이로 인해 감리교회를 비롯한 한국교회는 현재 몸살을 앓고 있다. 그렇다고 방언을 거부하거나 무시하거나 터부시해서도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이 무엇이며 방언은 어떻게 받는 것인지를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방언은 교육을 통해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마찬가지이다. 노력이나 수고나 훈련을 통해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어느 순간 바람과 같이 임하는 것이다.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과 같이 성령으로 난자는 다 그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방언의 99%는 의도적이며 인위적으로 발생한다. 또한 일부 몰지각한 목사들에 의해 방언이 가르쳐지고 훈련되어지는 것과 같이 장난질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방언을 통하여 자신들의 탐욕과 이기심을 채우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단이며 사이비이다. 

지혜로운 것 같지만 그들의 방언은 거짓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단과 사이비의 길을 걸어갈 것이며 소위 말하는 교주의 모습으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려 할 것이다.

오늘날도 방언을 말하며 방언을 통해 성령의 역사를 체험을 하려는 이들이 많다. 방언을 훈련시키는 목사와 교회야 말로 영적으로 깨어 있는 교회인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과거 기도원 운동의 병폐가 남아 있는 것이다. 방언 집착증이 한국교회와 감리교회에 남긴 아픈 상처와 같다. 

지금도 감리교회와 한국교회 안에서 방언의 은사를 팔아먹는 먹사들이 있다. 그리고 은사를 사모하려는 것이 영적인 갈증이라고 생각하는 평신도들도 많이 있음을 본다. 그래서 세상의 교회는 속고 속이는 세상의 축소판이 되어 있다. 

예언의 은사도 마찬가지이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와 감리교회안에서 행해지는 예언은 무당들의 예언과 별 다르지 않다. 성경은 시대를 분별하라 하셨다. 이 분별이 예언이 아니다. 물론 지금도 하나님의 예언은 몇 몇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루어 지고 있다. 이러한 예언에 대하여 소위 말하는 예언자들의 모습을 보라. 그들이 예언을 통해 자신의 탐욕과 이기심을 채우고 있는가? 그렇다면 100% 그는 참 예언자가 아닐 것이다. 예언을 통해 이타적인 유익을 구하며 교회의 덕(교회를 교회답게 하려 함)을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전하려 하는가? 그렇다면 그는 참 예언자일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금이빨을 받게 된다고 하였었다. 왜 금이빨인지는 모르지만 성령의 역사를 통해 금이빨이 생기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한국 우리 감리교회 안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금가루를 통해 나타난다고 가르치고 행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좀 그렇다. 왜냐하면 금가루보단 금이빨이 더 나아보이니 말이다. 

미국이 선진국이긴 선진국인것 같다. 성령이 미국 교회엔 금이빨을 주며 한국교회는 금가루를 날리게 하니 말이다. 왜 금이빨이며 왜 금가루인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것에 집착을 하게 된다. 돈과 금에 마음을 빼앗긴 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에 대하여 100%확신은 하지 않지만 99%는 성령의 역사란 말엔 회의적이다. 

금은 돈이다. 
금은 거룩한 성별을 뜻해 성물을 만드는데 사용되기도 하지만 금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사치이며 우상이다. 돈과 금은 타락이며 우상을 뜻한다. 맘몬인 것이다. 교회 안에 흩날리는 금가루가 순도 99% 금가루일까? 입안에 생긴다는 금 이빨이 순도 99%의 순금일까? 그것도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제발 성령의 역사를 두고 장난치지 말았으면 한다. 다른 교단의 목사야 그렇다 하더라도 감리교회 목사라도 말이다. 

성령의 역사를 두고 헛된 욕망을 부풀리지 말자. 

성령의 역사를 두고 영적인 장사를 하려 하지 말자. 이것이야 말로 영적인 이리들의 모습이다. 지혜를 가장한 뱀과 같은 이들이다. 그들의 입엔 저주와 축복이 있다. 그들은 전통을 말하지만 전혀 전통이 아니다. 정통을 말하지만 정통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이 다 미혹의 영들의 역사이다. 만약 전통이라면 미혹의 영의 전통이며 정통하다면 미혹의 영에 정통한 것이다. 

분명 성령의 은사는 성도들로 하여금 지혜롭게 한다. 
영을 분별케 하여 무엇이 진짜 인지 가짜인지를 인지하게 된다. 
그러나 거짓의 영은 은사의 모습을 가장한 영의 장난질이며 영의 약탈이 있는 것이다. 
이 약탈과 장난질에서 자유롭길 원한다면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진실로 회심을 하라.
그러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우리들을 자유케 하리라.

자유는 지혜의 또 다른 모습니다.
참 자유야 말로 진정한 성령의 은사이다.
그러나 세상엔 이미 자유를 가장한 약탈과 억압이 존재한다. 

목사가 억압을 하며 약탈을 하려 하는가? 그는 거짓 목사이다.
교회가 억압을 하고 탄악을 하려 하는가? 그렇다면 그 교회는 참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로 하여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시며 성령은 교회로 하여금 교통케 하며 나누게 하시는 자유를 허락하신다. 성도들의 삶을 참 자유케 하시는 거룩한 영인 것이다. 
참 자유는 참 지혜자에게 나타나는 열매이다.

성령은 교통케 하시는 영이다. 
그리고 교통은 또 다른 은사이다. 성도와 성도가 교통을 한게 한다. 믿음의 선조들과 믿음의 후예들을 교통케 한다. 성경과 성경을 교통케하며 성경의 말씀이 실체화 됨으로 성도와 교통하며 성도는 삶을 통하여 성경의 말씀이 실재임을 교통케 한다. 

이 교통이 바로 지식을 지혜가 되게 하는 성령의 능력이자 권세가 되는 은사이다. 
이 교통은 꿈을 통하여 나타나기도 하고 환상을 통하여 보게도 하며 현실속에서 나타나는 갖가지의 비유를 보게 될 것이다. 성경은 비유이자 현실이다. 우리의 삶도 그와 같이 비유가 되기도 하고 또 다른 현실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교통의 은사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이상을 보게 할 것이다. 
이 이상은 과거의 이상기도 하고 현재의 이상이기도 하며 미래의 이상이기도 하다.
성령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이상을 서로 교통케 한다.
과거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성령안에서 과거는 또 다른 현재가 된다.
현재는 단순한 현재가 아니다. 성령안에서 현재는 또 다른 과거가 되거나 미래가 된다. 

미래가 궁금한가? 또 과거가 궁금하며 현재가 궁금한가?
그렇다면 성령의 은사를 받고 지혜로와지길 바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누구도 그의 영혼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며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못하는 참 자유인(구원)이 될 것이다.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맺어진 그 사랑의 줄(교통)을 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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