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자, 선지자 그리고 변증가
구도자, 선지자 그리고 변증가
  • 노재신
  • 승인 2018.05.28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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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존재하는 자

나는 오늘 이 글을 쓰면서 이 찬양을 들는다. "The Light Of Life"


신(하나님)을 향한 귀납적인 모습을 보임이 구도자들의 모습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시대의 표적)을 통해 신(하나님)에게 나아가려 함이며 신(하나님)의 존재(이름)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성경과 무속을 제외한 세속종교들이 대부분 그러하다.

신(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연역적인 모습을 보임이 성경이며 무속인들의 모습이다. 신(하나님)을 통해 세움받은 선지자 혹은 무당을 통해 신의 이야기를 전하며 그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이해하고 설명하려 한다. 그래서 신(하나님)의 이름이 존재한다. 왜 그런지는 설명이 불가이다. 단지 그 믿음만이 그 신(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던지 아니면 부정하던지 하게 될 것이다. 

무당들이 섬기는 신은 대부분 OOO장군이다. 한 마디로 장군 신을 섬기는 것이 무당들이다. 이 장군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으니 미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미신은 아니다.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이 섬기는 신은 유일신이다. 그래서 그 이름을 하나님이라 하며 각자의 고유 언어로 다르게 불려지기도 한다. 성경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다. '나는 나다.'로 간단히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니 성경의 이름은 여호와 혹은 야훼라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 신(하나님)의 분명한 이름이 아니다. 단지 풀어진 뜻을 하나의 단어로 집약하여 부르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선 성경을 통하여 증거되는 신의 이름은 이것이라 정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하나님이야 말로 미신이라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을 미신이라 하니 무슨 저런 목사가 있냐? 하나님을 어떻게 미신이라 할 수 있느냐? 저런 무식한 놈이 다 있는가 하고 노하실 분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만 그렇단 얘기다. 신(하나님)은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언어적 표현일뿐이다.

영의 언어를 알고 있는 이가 있는가? 
빛의 언어를 알고 있는 이가 있는가? 
생명의 언어를 할고 있는 이가 있는가?
진정 신(하나님)의 언어를 알고 있는 이가 있는가 말이다.

나는 확언을 한다. 
신(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다 하는 이가 있다면 바로 그가 이단이자 사이비라고 말이다.
신, 하나님, 여호와, 야훼, 알라, 데오스, 갇 등등 이 모든 단어는 그 분을 뜻하는 각각의 언어로 표현된 대명사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 단어를 신(하나님)의 진짜 이름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신(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고 이해를 시키고 입증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반면 무당은 자신이 섬기는 신을 최영 장군신이라 할 때 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까? 왜 최영 장군인지 이해를 시켜야 하고 이래서 최영 장군이라 입증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최영 장군신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당들을 믿지 않는다. 무당은 사이비일 뿐이다. 무당들이 섬기는 장군들의 이름을 갖고 있는 신은 진짜 신(하나님)이 아니다. 

우리 목사들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다. 그 분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대명사일 뿐이니 그 대명사를 통해 그 분에 대하여 설명해야 하며 이해를 시켜야 하고 할 수 있으면 입증도 해야 하니 말이다. 그래서 목사들의 설교나 신학자들의 학설은 성경을 기반으로 한 변증이라 부른다.

이것도 좀 우수운 것은 신(하나님)은 목사들과 신학자들의 변증이 필요할까? 만약 진정 목사나 신학자의 변증이 필요한 신(하나님)이라면 그 또한 더 이상 신(하나님)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인간의 설명이 있던 없던.... 그리고 목사와 신학자의 변증이 있던 없던 그 분은 그 분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분의 진짜 이름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다. '나는 나"일 뿐이다. 누가 뭐라 하든 누가 그렇다 하든 아니라 하든 그 것과 관계없이 그 분은 그 분일 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이름이 대명사라 할지라도 말이다. 

원래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이름 그 자체가 언어로 표현된 대명사일 뿐이다. 내 이름이 '노재신'이라 하여도 '노재신'이 내 존재가 아니다. 다만 내 존재를 지칭하는 언어적인 표현일 뿐이다. 이 언어적 표현도 동명이인이 있다면 헷갈릴 수 있다. 진짜 '노재신'이 대체 누구인가 말이다. 

그래서 진짜 '노재신'을 구별하기 위해선 이해와 설명 그리고 입증이 필요한 경우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럿인 '노재신' 가운데 진짜 '노재신'을 구별 또는 분별할 수 있을까? 보자마자 아 이 사람이 진짜 '노재신'이다 하고 분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런 분별의 은사는 보통 사람들에겐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렵다. 그래서 때론 힘든 것이다. 

진짜 신(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그 신(하나님)의 이름을 명확고 분명하게 부르고 있는 사람(종교)이 누구일까?
이 또한 보자마자 이 사람이라 할 수 있는 분별의 은사가 있다면 너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극소수이니 또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리고 분별의 은사가 있다 하여도 그 분별의 은사 자체도 진짜 인지 가짜인지 또 분별하기 어렵다.

그래서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그 분에 대하여 변증을 하려 하는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분이 진짜이며 내가 부르는 이 이름이 진짜 그 분이라는 사실을 설명, 이해, 입증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종교 가운데 기독교 신학만이 발전을 하였다. 다른 종교들은 신학이 없다. 다만 존재한다면 그 종교의 철학이 있을 뿐이며 윤리와 도덕적인 종교적 가르침이 있을 뿐이다. 스님이 부처가 왜 부처인지 변증을 하던가? 힌두교의 사제들이 힌두교 신들에 대한 변증을 하던가? 무당들도 자신이 모신다는 신에 대하여 변증을 하지 않는다. 오직 기독교만이 아이러니하게 변증을 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을 하였지만 변증으로 존재하는 신(하나님)은 진짜 신(하나님)이 아니다. 그런데도 목사와 신학자들은 변증을 하려 한다. 그래서 이단과 사이비들이 많다. 진짜 그 분에 대하여 같은 대명사(하나님)를 사용하며 변증을 하지만 그 변증이 옳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슷하지만 다르다. 어떤 경우는 아주 다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떤 변증이 또 진짜 옳은 변증이 될 것이냐가 문제이다.

자신을 '노재신'이라 말하는 여럿의 사람 가운데 누가 진짜 '노재신'인가를 옳게 변증할 수 있는 이가 누구이냐 말이다. 그래서 이름에는 그 뜻이 있는 것이다. '노재신'이란 이름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진짜 '노재신'인 것이다.
결국 그 삶이 그 생활이 '노재신'의 이름의 뜻에 맞게 사는가 아닌가를 통해 동명이인의 '노재신' 가운데 모두가 자신의 이름이 '노재신'이라 함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노재신'은 '노재신'의 뜻과 같이 살아가는 사람이 진짜가 '노재신'이 되는 것이다. 

신앙과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그 이름에 걸맞는 모습을 보이는가 말이다.
신(하나님)의 이름의 뜻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다. 그러니 그 신앙도 그 종교도 스스로 존재하는 믿음(신앙)과 스스로 존재하는 종교가 진짜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이자 종교가 되는 것이다.

목사(사제)가 있음으로 교회가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그 교회는 진짜 교회가 아니다.
목사(사제)가 있음으로 믿음(신앙)이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그는 진정한 성도가 아니다.

진짜 교회는 하나님으로 인해 교회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진짜 성도는 하나님으로 이해 성도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란 말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셨다. 그 누구의 억압이나 강압 그리고 핍박과 오해가 있었다 할지라도 스스로 존재하게 된 예수님의 모습을 잃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배반하고 도망갔어도 예수님은 예수님이셨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빌라도의 법정에 섰을 찌라도 예수님은 예수님이셨다. 어찌 너희 백성들이 너를 버렸는가라는 조롱을 받았어도 예수님은 예수님의 모습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십자가 상에서도 예수님은 예수님의 모습을 잃지 않았고 무덤 속에서도 그러하셨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존재하는 기독교와 교회들이 사라진다 하여도 예수님은 예수님으로 존재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과 같다. 예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며 예수님은 예수님인 것이다. 

성령도 마찬가지이다. 
설혹 이 땅에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이 사라지고 성령을 말하는 이들이 사라지며 성령이라는 단어 조차도 잃어버리고 사라진다 하여도 성령은 성령으로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성령은 또 다른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영이라 함이다.

만약 지구의 역사가 종말을 맞고 모든 사람들이 사라진 때가 온다면 하나님은 어찌 계실까? 하나님을 부르는 이도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이가 없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분명 하나님이라 부르는 대명사의 이름은 더 이상 듣지 못할 것이며 세상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이라 불려지는 인간 언어적 단어의 소리는 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스스로 존재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이 진짜 하나님이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을 보라. 인간이 사라지고 지구상에 종교들이 말하는 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사라진다면 그 종교의 신이 존재할 수 있을까? 

무당들이 다 사라지고 더 이상 장군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없어진다면 무당들이 섬기던 그 장군신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장군신이 존재하는 것은 무당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당이 곧 그들이 부르는 장군신인 것이다. 그러나 무당들은 말을 한다. 어느날 장군신이 내게 찾아 왔다고 말이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무당이 사라져도 그 장군신은 존재해야 한다. 그렇다면 비록 그 이름이 아무개 장군이라 불려지지만 그 아무개 장군신이야 말로 참 하나님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싸움들이 있다. 
이 영적인 싸움은 신을 찾는 모든 이들이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서로가 자신들이 진짜 사제이며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진짜 하나님이라 주장하는 것이 영적인 싸움이다. 이 영적인 싸움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인간사의 일부가 된다. 

이단과 사이비와 이교간의 경쟁이 영적인 싸움이다.
이교도들과의 경쟁이 또 다른 영적인 싸움이며 심지어 신은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들과도 갈등 및 경쟁을 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싸움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적인 싸움이라 것이 하나님이 귀신들과 싸운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은 홀로 하나님이심으로 귀신들과 가투거나싸우지 않는다. 더불어 하나님은 마귀 사탄과도 영적인 싸움을 하지 않으신다. 다만 진리의 자녀들과 거짓의 자녀들과의 영적인 경쟁(싸움)이 존재할 뿐이다. 

누가 진리의 자녀일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닐 가능성도 있다. 
참 하나님은 누구와 함께 하실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일까? 그럴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오늘날 교회가 빛과 맛을 잃고 목사들과 성도들이 타락하였음으로 그렇지 않을 가능성은 매우 높아졌다 할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가능성이 높아진 것을 알기에 세상은 '개독교'라 놀리는 것이다. 

기독교가 진짜 개독교일까? 
그렇다면 제 아무리 아니라 해도 보이는 모습은 개독교의 모습이므로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기독교가 진짜 개독교가 아닐까? 
그렇다면 왜 개독교처럼 살고 있는가? 왜 진실하지 못하며 왜 거짓을 즐겨하며 불법을 따르고 불의를 옳다 하는가 말이다. 기독교가 진짜 기독교가 되기 위해선 기독교답게 살면 된다.
그 기독교 다움이 때론 세상 사람들에 의해 오해가 되고 왜곡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진짜 기독교라면 그들의 오해와 왜곡과 무관하게 기독교로 스스로 존재해야 한다. 

초대교회가 그랬다. 
초대교회가 무시와 조롱 그리고 핍박과 환란을 맞이하였지만 그 억울함을 뒤로 하고 기독교 다움을 잃지 않았다. 초대교회가 세상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무시하고 조롱하며 핍박과 박해를 하였어도 기독교로서의 초대교회는 존재하였다. 

당시 초대교회의 박해와 핍박을 본 사람들은 저들은 바로 사라질 것이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사라지지 않았다. 왜? 스스로 존재하시는 참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로써 스스로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이 글도 변증이다. 
내가 쓰는 이 글도 세상의 수없이 많은 변증의 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만약 내가 믿는 하나님이 거짓이며 내가 말하는 주장이 거짓이라면 언젠가 이 모든 글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다만 내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시며 내가 주장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비록 내가 사라진다 할지라도 이 글은 스스로 남아 이 글의 변증이 진짜임을 입증할 것이다. 

성경이 그런 것이다.
학자들은 시대적이고 정치적인 환경과 요인에 의해 성경 66권이 정경화가 되었다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니다. 성경은 성경 스스로 존재해 온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성경을 통하여 증언되어진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시니 그런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라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의 영의 감동이라고도 부른다. 

만약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 아니거나 또는 진실로 그 시대적 교회적 환경과 정치적인 요인에 의해 인위적인 모습으로 정경화가 되었다면 언젠가 반드시 성경 66권을 흩어질 것이다. 낱 권의 성경으로 남거나 아니면 쪽 복음과 같이 진실한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진리의 말씀 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신학자 불트만은 성경을 난도질 하였다.
더 이상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거나 합리적으로 설명이 될 수 없는 내용이 성경안에 있다면 이것은 인간이 만든 신화에 불과하니 모두 성경에서 빼버려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다. 이 주장은 실로 엄청난 파급효과를 남겨 주었다. 그래서 교회는 이러한 불트만 학파들의 주장에 의해 지금도 시련을 겪고 있으며 이러한 불트만 학파들의 주장에 의해 신학계와 신학자들의 믿음과 영혼은 온통 뒤흔들려져 너무도 심각하게 뒤틀려져 있다. 

감독회장의 문제를 두고 사회법을 찾았던 지난 일들이 아직도 감리교회를 뒤흔들고 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또 다시 감독회장 선거무효가 되었고 감독회장 직무정지 가처분이 났으며 감독회장 직무대리가 세워져 임시 감독회장의 직무를 수행 중에 있다.

감리교회가 큰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외부적인 요인보단 내부적인 요인에서 기인한 것이니 감리교회를 향한 핍박이나 박해라 할순 없다.
내부적인 갈등이다. 내부적인 싸움이다. 그러니 이 또한 진실의 자녀와 거짓의 자녀들과의 영적인 싸움인 것이다. 

만약 감리교회가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웨슬리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면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안타깝게도 영국의 감리교회는 명맥만 유지하다 성공회로 흡수되었단 얘기를 들었다. 미국의 감리교회는 또 어떠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한국 감리교회는 내적인 큰 시련을 겪고 있다. 

이 시련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겨내지 못한다면 지금은 그리고 우리 세대엔 한국 감리교회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지만 멀지 않은 후대엔 한국 감리교회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하나님의 역사를 믿으며 성령의 감화와 감동하심이 있음을 믿으며 감리교회가 웨슬리의 진실한 회개(회심)를 통해 이루어진 전통과 체험이 살아 있는 교회라면 때론 쇄퇴함은 있을진 모르지만 반드시 살아 남아 감리교회가 감리교회임을 스스로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과 같이...
그 온전하신 하나님을 믿는 목사와 성도가 감리교회 안에 남아 있기를....
그리고 웨슬리에게 임하였던 성령의 역사하심이 감리교회 안에 남아 있기를....
무엇보다 감리교회의 교리와 장정이 참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모습이 되기를 말이다.

진정 그렇게만 된다면 어렵다 어렵다 위기다 위기다 하는 이들이 많을 지라도 아니라 우리에겐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이 있으며 하나님의 영에 의해 감동된 이상인 감리교회(교리와 장정)가 다시 살아나 움직일 것이며 타락한 한국 사회를 변혁시키고 통일된 한반도의 유일한 소망이 됨을 변증하는 감리교회의 목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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