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갑’의 횡포에 무섭게 저항했다
예수는 ‘갑’의 횡포에 무섭게 저항했다
  • 기독교타임즈UNION
  • 승인 2018.06.06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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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현장] 김목화 기독교타임즈 해직기자

미디어오늘에 지난 6월 1일 자로 게재된 김목화 기자의 [미디어현장] 기고입니다.

원문 보기 : 예수는 ‘갑’의 횡포에 무섭게 저항했다

언젠가 도적같이 재림한다던 2018년 전 그 예수님이 나를 지키러 서울 광화문광장으로 꼭 찾아오실 것 같았지만 예수님은 오지 않았다. 노조 투쟁 100일이 지나도, 나와 동료들이 목사들에게 억울하게 해고당하는 비상식적인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태평로 사무실로 오지 않으셨다. 해직 후 50일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아직 소식이 없다.

기독교라는 종교 프레임 속에서 기자로 살아가는 일이 흥미롭게 보일 수 있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들먹거리며 대통령보다 더 대단한 권세를 부리려는 목사들 때문이다. 특히 대기업 회장님 버금가는 목사들과 뼈대 있는 집안의 금수저 목사들, 다수를 점유한 유서 깊은 신학교 출신자들을 상대로 언론인의 사명을 감당하기란 보통의 내공으로는 쉽지 않다. 차라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취재하거나 탐사보도를 하는 것이 속 편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교회 공동체 내에도 학연과 지연 중심의 정치 집단이 존재한다.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는 교회공동체 속 대다수 정치 목사들에게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을 찾아보기란 더욱 어렵다. 성전이 되는 몸과 마음에 십자가는 없고, 오직 자신이 하나님인 냥 스스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죄를 스스로 용서하고 누군가 자신의 죄를 지적하면 뉘우치기보다 더욱 악하게 진화해 복수를 선택한다.

지난 4월 편집국 기자 전원이 부당하게 해고됐다. 기독교인으로서 기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은 보통의 기자와 달리 특별한 점이 있다. 하나님을 향한 신념이다. 이 ‘믿음’은 기자로서 당연한 의무와 가치관을 내면에서 더욱 강하게 작동시킨다. 취재의 스펙트럼이 종교에 머물러 있어서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기 위한 두려움이 있기에 정의사회 구현은 물론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일에 파수꾼을 자처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 때문이다.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세상의 공의를 위해 죽기까지 순종했던 저널리스트가 또 있을까. 

▲ 기독교타임즈 기자 전원이 부당 징계를 받았던 지난 4월13일 ‘노조 투쟁 74일째’ 되던 날의 편집국 모습. 투쟁은 부당해고 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사진=언론노조 기독교타임즈분회
▲ 기독교타임즈 기자 전원이 부당 징계를 받았던 지난 4월13일 ‘노조 투쟁 74일째’ 되던 날의 편집국 모습. 투쟁은 부당해고 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사진=언론노조 기독교타임즈분회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서 알려야 할 사실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부당한 징계를 받고 해직기자로 전락되어 보니 더욱 그렇다. 기자가 찾아가야 할 곳, 두어야 할 시선, 귀를 기울여야 할 곳은 높은 곳에 있지 않다. 펜 끝이 닿기 어려운 소외된 지역, 억울하고 아픔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낮은 곳에 있다. 예수님이 펼쳤던 저널리즘이 그랬다.

예수님이 찾아가 놀라운 기적을 보인 곳은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갑’들의 리그가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님은 ‘갑’의 횡포에 무섭게 저항했다. 기자라는 직(職)과 업(業)이 똑같다. 오직 정론직필의 사명으로 사는 기자들의 취재 현장에는 언제나 뒷골목의 ‘을’과 저 높은 곳의 ‘갑’들에 대한 극적 반전이 공존한다. 

주변의 모든 일에 대한 취재와 보도는 기자에게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보니 기자의 사명은 종교를 초월한다. 기독교인이어서가 아니라 기자에게는 투철한 기자정신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 공정보도 사수를 위한 기자의 임무는 기독교인으로서도 당연한 일이다. 오직 두려운 것이 있다면 사회적 평가가 아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기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지극히 상식적인 기자의 직업윤리를 비정상적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매달았던 2000년 전의 일을 기자들에게 똑같이 하고 있다. 거꾸로 가는 교회공동체의 모습을 목도하며 펜을 든 기자들을 외면하고, 돌을 던지며, 칼을 들이대더니 결국 폭력은 집단 징계와 전원 해고로 끝났다. 

투쟁 중 교회공동체 내에서 ‘노조기자’ ‘노조필패’란 말을 많이 들었다. 더욱 많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지만 “종교 공동체 안에서 예민하게 굴고 싶지 않다”며 외면하는 모습을 보며 기자라는 내 직업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교회 밖의 일반 언론의 기자 동료들이 부러웠다. ‘노조 기자’에게는 130만 명의 독자가 있고, 사무실은 태평로 중심에 위치하고 있지만, 단 한 개의 촛불도, 희망도 켜지지 않았다. 

▲ 대한기독교감리회에서 기독교타임즈 기자에 대한 마지막 징계위원회가 열렸던 지난 4월13일 김목화 기자의 모습. 김 기자는 미디어오늘에 “해고통지서를 받은 기분은 사진 속 표정과 같다. 실소가 터져 나왔다”며 “‘이제야말로 진짜 투쟁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진=김목화 기자 제공
▲ 대한기독교감리회에서 기독교타임즈 기자에 대한 마지막 징계위원회가 열렸던 지난 4월13일 김목화 기자의 모습. 김 기자는 미디어오늘에 “해고통지서를 받은 기분은 사진 속 표정과 같다. 실소가 터져 나왔다”며 “‘이제야말로 진짜 투쟁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진=김목화 기자 제공

무너지고 망해가는 교회공동체 앞에서 나는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권력 앞에서 “언론노조 기독교타임즈분회 필승!”을 외치고 있다. 그나마 덜 외로울 수 있는 이유는 내 옆에 “노조필승”을 외치는 동료 기자가 있고, 이런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기자 한 명의 펜 끝이 촉촉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교회공동체, 기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 당연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는 오늘도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이게 교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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